작성일
2019.12.22
수정일
2019.12.22
작성자
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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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

[이론으로 조망하는 생명현상] 살아있다는 것

[이론으로 조망하는 생명현상] 살아있다는 것

생명과학  분도78 (2019-12-20 09:32)

시작하며

살아있는 상태가 무엇인지 누구나 직관적으로 안다. 생명체와 무생물 사이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생명인가? 살아있는 대상을 상식적 수준에서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생명체는 동적(動的)이다. 자극에 반응하고, 자발적인 내적?외적 역동성을 가지며, 발달과 노화, 재생산 혹은 자기복제의 과정을 유지한다. 죽음이란 이러한 제반 특성을 상실한 상태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접근은 단지 생명의 특징을 현상론적으로 기술한 것으로서, 생체계가 일반적인 물리계와 어떻게 근본적으로 구분되는지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그림 1 :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 생명에 대한 정의는 생명체의 다양성으로 인해 더욱 쉽지 않다. (Image source: Manchester Community College)

 

기계 장치로서의 몸

생리학적인 현상을 순전히 기계적인 작용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르네 데카르트에서 기원하는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은 근대의 진전과 더불어 등장한 기계 장치로의 유비(analogy)로서 종종 묘사되곤 했다. 호흡과 에너지 변환, 그리고 근육 운동은 증기기관이나 자동차 엔진의 작동으로, 세포의 미세 구조와 그 기작은 초소형 시계 등의 정밀 자동 기계로, 그리고 심장의 운동과 혈액의 순환은 펌프 등의 유체 기계 장치로... 지금까지도 생명체의 물리적 측면에 집중하는 연구에서 빈번히 채택되는 접근 방식이기도 하다. 더불어, 신경망 등을 전기 신호의 회로로서 이해하는 것 역시 그 성격이 완화되기는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기계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론은 생명 현상을 보다 작은 요소들의 인과론적·기계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reductionism)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인과 관계의 총체는 원칙적으로 고전 물리학적 법칙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면에서 전반적으로 결정론(determinism)적인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된다.

 

엔트로피와 정보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고찰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헌은 아마도 에르빈 슈뢰딩거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일 것이다. 루트비히 볼츠만의 유산을 물려받은 빈 출신의 물리학자 답게, 슈뢰딩거는 생명체가 열역학적 열린계(open system)라는 점에 주목한다.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이 일어나는 열린계에서는, 고전적인 닫힌계(closed system)에서 성립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국소적으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세포로부터 조직, 기관, 개체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에서 극도로 정렬된 위계적 구조를 갖는 생명체가 필연적인 ‘무질서도’ (entropy)의 증가라는 물리적 법칙을 우회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슈뢰딩거는 정보라는 현대 과학의 중요한 개념을 생명 현상에 처음으로 도입한다. 즉 열린계·다체계로서의 생명체는 통계역학적 항상성(homeostasis) 유지를 통해 내부 정보를 보존한다 (‘무질서로부터의 질서’). 한편, 이러한 항상성 유지는 준안정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개체가 보존하고 있는 정보는 유전을 통해 다음 세대에서 재생산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슈뢰딩거는 유전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비주기적 결정(aperiodic crystal)과 같은 물질이 세포 내에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질서로부터의 질서’).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생물학적 기계론·환원주의의 금자탑이라고 부를 수 있는, 20세기 후반 분자생물학의 확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확률과 인과율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1970)은 생명 현상에 대한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견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에세이로 유명하다. 그 자신이 초창기 분자생물학의 선구자로서, 모노의 관점은 우선 생명체의 모든 특성이 유전자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정보와 이를 복제, 전사, 번역하는 분자 기계의 작동 과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 정보의 자가 해석을 통해 합성된 여러 종류의 단백질에 의해 생화학적 대사(metabolism)가 진행되고 그 최종 산물이 다시 대사 경로의 초기 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되먹임(feedback) 회로에 의해 제어되는, 철저히 환원주의적인 과정을 통해 전체적인 항상성이 유지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유전 정보와 정교한 분자 기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모노에 따르면 그것은 우연에 의해 발생하여, 확률적 유전자 변이에 의해 추동되는 진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과도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에 대한 현대 생물학의 일반적인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노 이후 약 50년 간 우리는 생체분자 단위 기전 규명과 유전자 조작·편집에 기반한 의약학의 눈부신 성과를 목도하고 있지만, 과연 이러한 이해의 총체가 생명에 본질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림 2 : 왼쪽으로부터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연과 필연』,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Source of images: Amazon.com)

 

평형과 비평형

분자생물학 창시자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슈뢰딩거가 본래 전하고자 했던 생명에 대한 통계열역학적 해석은 사실 기계론·환원주의적 요소를 그다지 두드러지게 갖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현대의 생명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극히 다양하고 복잡한 분자 기작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생체계가 평형 상태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또한 슈뢰딩거가 간파한 바와 같이 열역학적으로 열린계일 필요가 있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에서는, 이러한 비평형 상태의 열린계에서 미시적인 요동의 증폭에 의해 안정한 국소적 질서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자 하고 있다. 자기조직화(self-organisation)라고 불리우는 생명 현상의 일반적이고도 핵심적인 개념이 프리고진 등에 의해 제기되면서, 생명에 대한 관점이 과도한 기계론, 환원주의 및 결정론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에 대안적인 시각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과의 그물

21세기 계산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시스템생물학이나 생물정보학과 같은 몇몇 신생 학문 분야가 훨씬 완화된 기계론적 접근이 오히려 복잡한 인과관계의 연결망을 다루는 데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분자생물학에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주요 메커니즘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유연하고 가변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새로 개발된 실험 기법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기계론적, 혹은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환원주의-전체론, 결정론-비결정론과 같은 방식의 이분법을 탈피한 지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경지가 열리게 될 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1.    Erwin Schr?dinger, What is Life?: With Mind and Matter and Autobiographical Sketch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2);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서인석, 황상익 공역, 한울, 2017 
2.    Jacques Monod, Le hasard et la n?cessit?. Essai sur la philosophie naturelle de la biologie moderne (Points, Paris, 2014);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조현수 역, 궁리출판, 2010
3.    Ilya Prigogine & Isabelle Stengers, Order Out of Chaos: Man’s New Dialogue with Nature (Bloomsbury, London, 2018); 일리야 프리고진, 이사벨 스텐저스 공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신국조 역, 자유아카데미, 2011
4.    M. H. V. Van Regenmortel, Reductionism and complexity in molecular biology. EMBO Reports 5, 1016-1020 (2004)
5.    D. J. Nicholson, Is the cell really a machine?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 477, 108-126 (2019)

연재중 이론으로 조망하는 생명현상
성백경 (KIST 유럽연구소)
물리학을 전공한 수리생물학 연구자입니다. 정교하고 복잡한 낱낱의 생명 현상을 때로는 멀리서,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연구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교양인의 관점에서 비형식적인 에세이의 성격을 갖는 연재를 시도해 보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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