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8.03.18
수정일
2018.03.18
작성자
손님
조회수
210

‘세균학의 아버지’가 된 시골의사

천재 작가 이상을 비롯해 이광수, 김유정, 안톤 체호프, D. H. 로렌스,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 결핵에 걸리면 얼굴이 창백해지므로 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흑사병(페스트)에 비유해 결핵을 ‘백색 페스트’로 부르기도 했다.

결핵은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이자 지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하는 질병이기도 하다. 최근 200년 동안 결핵으로 사망한 이는 약 10억명에 이른다. 또한 결핵은 기원전 수천년 전의 구석기인 뼈 화석에서도 흔적이 발견될 만큼 역사가 오래 됐다.

이처럼 참담한 질병의 원인에 대해 1870년대만 해도 영양실조라거나 유전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결핵이 세균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이 한 과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1882년 3월 24일 베를린에서 열린 병리학 학술대회에서였다. 단상 위에 올라선 로베르트 코흐가 당시 병사자의 15%를 차지하던 결핵의 원인균을 찾아냈다고 발표하자 장내는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1843년 독일 클라우슈탈에서 광산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코흐는 다섯 살 때 신문을 보며 혼자서 글을 익힐 만큼 영리했다. 괴팅겐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그는 베를린과 함부르크 등지에서 경력을 쌓고 보불전쟁 때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는 등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정반대 성격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그는 조용한 시골마을의 개업 의사로 정착해야 했다. 아내는 반복되는 일상의 따분함을 토로하는 그에게 생일선물로 현미경을 선물하며 달래기도 했다. 그런데 그 현미경으로 인해 코흐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고 말았다.

진료보다 현미경으로 관찰하기를 좋아하던 그가 탄저균의 실체를 밝혀낸 것이다. 소나 양 등의 반추동물에게서 주로 발생하는 탄저병은 피부의 상처나 내장의 염증 혹은 호흡기를 통해 사람에게도 감염될 수 있어 당시 농민들의 큰 골칫거리였다.

탄저균 발견 후 ‘코흐의 4원칙’ 발표

탄저병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세균을 발견한 코흐는 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 실험결과를 검증받은 후 1876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탄저균은 다른 균에 비해 크기가 큰 편이어서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의 연구는 전염병이 세균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발견이었다.

특정 미생물이 특정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확인한 그는 세균학 연구의 기본 바탕이 되는 ‘코흐의 4원칙’을 발표했다.

즉, 병원균은 질병을 앓는 환자나 동물에서 반드시 발견되고, 순수배양법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그처럼 분리한 병원균을 실험동물에 접종하면 동일 질병을 일으켜야 하며, 감염시킨 동물에서 동일 병원균을 다시 분리 배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질병을 일으키는 새로운 세균의 발견에서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세균 연구에 몰두한 코흐는 병원 업무를 등한시한 나머지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바로 정부였다. 코흐의 능력을 인정한 독일 정부는 1880년 베를린 국립보건연구소를 설립해 그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그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시화로 더욱 기승을 부리던 결핵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과정에서 코흐는 염색하기 어려운 결핵균을 강력한 염색약으로 염색하는 특수염색법을 고안해 결핵균의 존재를 증명했다.

전 세계 우표에 가장 많은 등장한 과학자

또한 그는 응고혈청을 사용해 결핵균을 배양하는 데도 성공했으며, 이 공로로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결핵균을 발견한 지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82년에는 결핵 예방 및 조기 발견을 위해 3월 24일이 세계 결핵의 날로 지정됐다. 결핵균의 발견 덕분에 그는 뉴턴을 제치고 전 세계 우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과학자가 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제자를 데리고 다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그곳에 콜레라가 만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콜레라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인도까지 다시 찾아가서 연구한 끝에 1883년 드디어 콜레라균을 찾아내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콜레라의 감염경로를 밝혀 예방법을 내놓았다.

1890년에는 ‘투베르쿨린’을 개발해 결핵 치료약으로 발표했다. 이 약은 피부결핵에서 놀라운 치료 효과를 보였으나 폐결핵 등의 임상실험 결과에서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학계에서 그의 명성은 추락했으며, 그 역시 투베르쿨린 개발을 실패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투베르쿨린은 결핵의 알레르기 진단 약으로 오늘날에도 활용되고 있다.

더구나 그 무렵 코흐는 아내와의 이혼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다. 전원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아내가 시골 의사에서 저명한 세균학자로 변신한 그의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에만 매달려 재기에 성공했다. 아프리카로 가서 현지에서 많이 발생하는 우두와 말라리아 등에 대한 연구를 하고, 현지 학자들에게 의학을 전수해 아프리카의 공중보건 향상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또한 그가 몸담았던 베를린 국립전염병연구소와 베를린 의과대학은 그의 명성으로 세계 의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법의 탄환으로 불린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을 발견한 파울 에를리히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인 베링, 피비거 등이 그의 제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겸손했다. 그는 자신을 칭송하는 자들에 대해 “내가 발견한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지 5년 후인 1910년 독일 남서부의 휴양도시 바덴바덴에서 66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이성규 객원기자, 저작권자 2018.03.0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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